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화려함 이면의 고단한 삶을 그린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by chaechae100 2025. 7. 24.
반응형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포스터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포스터

1960년에 공개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는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을 통해 전후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조용히 비판한 작품입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멜로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여성을 상품화하는 유흥업계, 가부장적 질서, 그리고 여성 스스로의 내면적 갈등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심리적 리얼리즘 영화입니다. 나루세 감독의 대표 페르소나였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아 한 여인의 복잡한 감정과 자아를 절제된 연기로 완벽히 구현해냈으며 지금도 일본 고전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게이바 여성 케이코, 화려함 이면의 고단한 삶

이 영화의 주인공 케이코는 도쿄 긴자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는 마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 바의 소유주가 아니라 고객을 상대하며 술을 팔고 손님을 유지해야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유흥업계의 노동자입니다. 외모와 이미지, 말투와 눈빛까지 모두 계산된 상품으로 일해야 하며 매일 밤 계단을 오르내리며 삶과 생존 사이의 균형을 맞춥니다.

케이코는 과거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며 현재는 경제적으로 자립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남성 중심의 시선과 권력에 종속된 구조로 그녀는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도 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손님 중 누군가는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고 누군가는 결혼을 제안하지만 그 모든 제안 속에는 여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더 깊은 종속과 타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케이코가 매일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동선이 아닌 자신을 상품화하며 한 걸음씩 생존해가는 여성의 반복적 노동이며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고립된 삶을 상징합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스스로를 감추고 내려올 때마다 감정을 꾹꾹 눌러야 합니다. 이 반복은 영화 전반에 묵직한 상징성과 피로감을 더합니다.

선택의 자유인가, 구조의 속박인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냉정하게 그립니다. 케이코는 자립적인 여성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선택지는 모두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제한된 경로일 뿐입니다. 결혼을 하거나, 부유한 후원자를 두거나, 혹은 바를 늘리기 위해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자립은 가능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그런 모순에 있습니다. 케이코는 종종 나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결국 가난, 가족의 기대, 사회적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의해 조종됩니다. 남성 중심의 유흥업계에서 여성은 언제나 피로하고 감정은 외면되며 나이 들어서는 더 이상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주변 여성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적극적인 선택을 한 여성은 결국 비극을 맞이하거나 파멸에 가까운 결말을 겪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삶을 허락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조적 리얼리즘입니다.

나루세의 시선, 감정을 외치지 않는 슬픔

나루세 미키오의 연출은 이 영화에서도 절제된 미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카메라는 결코 인물에게 다가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는 케이코를 포함한 모든 인물이 사회라는 배경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은유합니다. 클로즈업보다 중간 쇼트를 택하는 나루세의 방식은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관객에게 더 깊은 몰입을 가능케 합니다.

또한 조명과 공간 활용 특히 계단의 반복은 영화 전체의 상징적 구조를 견고히 합니다. 계단은 위로 오르지만 결국 도달점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여성의 삶이 끊임없는 투쟁과 노력으로 채워지지만 어떤 확실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비유합니다.

음악 또한 매우 절제되어 있으며 때론 침묵이 더 큰 감정을 전달합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이 절제된 연출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슬픔, 그리고 여자로서의 좌절과 의지를 한 장면 한 장면 녹여냅니다. 그녀의 말보다 눈빛과 자세에서 드러나는 내면 연기는 지금 봐도 탁월합니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는 일본 고전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자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감정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한 인간이 시대와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지를 조용하게 말해주는 감정의 드라마입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섬세한 연출, 다카미네 히데코의 절정의 연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슬픔과 강인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성, 사회, 감정의 균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영화를 강력히 권하고 싶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