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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그늘 속에서 멈춘 사람들 동경의 황혼

by chaechae100 202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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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황혼 포스터
동경의황혼 포스터

동경의 황혼(東京暮色, Tokyo Twilight, 1957)은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작 가운데서도 유독 어두운 정조를 띠는 작품이다. 기존 오즈 영화들이 보여준 가족의 온기, 침묵 속 정서, 일상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아이러니 대신 이 영화는 철저히 침울하고 고립된 인물들을 통해 도시화된 일본 사회에서 인간성의 소멸을 응시한다.

1. 해질녘, 그늘 속에서 멈춘 사람들

동경(東京)은 일본의 수도이자 전후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의 상징이다. 황혼(暮色)은 하루 중 해가 저물며 모든 것이 흐릿하게 사라지는 시간이다. 오즈는 이 두 단어를 같이 배치하며 화려함 속에서 실체를 잃어가는 인간 존재의 상실감을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두 딸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하고 큰딸은 이혼을 숨기고 돌아온 채 어머니의 빈자리를 체념한다. 작은딸 아카미는 예상치 못한 임신과 이별, 그리고 정체불명의 어머니와의 재회를 겪으며 끝내 자신의 자리조차 상실한다.

오즈의 영화는 보통 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을 나누지만 동경의 황혼은 모두가 잃는다. 누구도 제대로 떠나지 못하고 누구도 남지 않는다. 그들의 시간은 황혼 속에 고정된다. 빛은 사라지고 모든 감정은 말해지기 전에 꺼진다.

2. 가족이라는 이름의 붕괴와 말해지지 않는 상처들

동경의 황혼이 충격적인 이유는 오즈 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태, 불륜, 자살, 가출, 외도 같은 테마가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결코 자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오즈는 이 모든 사건을 정적인 카메라와 차분한 앵글로 담아낸다.

주인공 아카미는 어머니 없이 자란 데 대한 공허함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마음속에서 수천 번 어머니를 잃었고 그 상실은 뒤늦은 재회로도 복구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딸의 현실을 눈치채고 있지만 직접 묻지 않는다. 딸은 아버지의 침묵을 원망하지만 동시에 그 침묵 안에서 위로받는다. 이들은 가족이면서도 감정을 나누는 데 실패한 익명의 타인이다. 결국 아카미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았던 감정이 결국 표현을 잃고 끝나는 방식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감정을 연결해 주기보다는 억누르고 지워버린다.

3. 도시를 이용한 카메라 연출

동경의 황혼은 오즈 영화 중에서도 도시의 공기와 공간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다다미방, 병원, 역 앞, 골목, 전화박스, 어둡고 허름한 바. 모든 공간은 정서적으로 닫혀 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역할만 수행한다.

오즈는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로우 앵글을 유지하면서도 정적인 장면들 사이에 도시 풍경을 자주 삽입한다. 전철이 오가는 모습, 인파 속을 걷는 인물, 어두운 불빛 사이를 지나가는 뒷모습. 그는 대사보다 더 많은 의미를 빈 공간과 도시의 리듬 속에 숨겨둔다.

카메라는 말없이 응시한다. 인물들이 마주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언제나 그 정적을 기록한다. 이는 단지 관찰의 차원을 넘어서 무너져가는 관계를 곁에서 바라보는 도시 자체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오즈는 이 영화에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는 희망이나 치유 대신 있는 그대로의 부재의 감정을 놓아두는 것을 선택한다. 동경의 황혼은 그래서 무겁지만 동시에 정직하다. 우리가 대면하지 않는 감정들, 말해지지 않는 아픔을 그대로 인정하게 만든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찬 영화

동경의 황혼은 단순히 우울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얼마나 자주 말하지 않고 묻지 않으며 감정을 잃어버리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오즈는 말한다. 행복은 환상일 수 있고 가족은 때로 더 큰 고독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침묵을 함께 견디는 것이 삶이라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줄 뿐이다. 그래서 동경의 황혼은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한 도시의 황혼에 불과했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저물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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