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おとし穴, Otoshiana, 1962)는 일본 전위 영화의 거장 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 감독과 실존주의 작가 아베 코보(安部公房)가 공동으로 창조한 실험성과 사회 비판을 겸비한 걸작이다. 이 영화는 실체 없는 권력의 폭력성과 개인의 무력함을 복합적으로 구성하면서 한편으로는 사회 구조에 대한 은유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 탐구의 장으로 기능한다. 테시가하라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보이지 않는 억압 체계를 무채색 톤의 영상 안에 담아냄으로써 관객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함정은 추리극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비가시적 폭력과 구조적 함정에 빠진 인간의 본질을 해부하는 철학적 영상시이다.
1. 실체 없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지배자
영화는 폐광촌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일용 광부로 어린 아들과 함께 폐광 지역을 떠돌며 일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어느 날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시체는 버려진다. 이후 영화는 살해당한 광부가 유령이 되어 이야기를 관찰하는 구조를 취하며 살아 있는 인물들과 유령의 시선이 교차되면서 복잡한 서사가 전개된다.
살해자에게는 이름도, 동기도, 정체도 명확하지 않다. 그는 국가도 아니고 특정 조직도 아니며 단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이라는 익명의 존재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진 듯 조직적이고 치밀하다. 그는 마을의 인물들을 조종하고 비밀스럽게 정보를 수집하며 또 다른 사람을 암살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명확한 권력 주체 없이도 억압이 작동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를 상징한다.
광부의 죽음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이용한다. 사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리된다. 이러한 전개는 관객에게 가해자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영화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테시가하라는 이 모호함 속에서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익명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고발한다.
2. 아베 코보의 서사와 테시가하라의 철학과 영상의 결합
함정은 테시가하라 히로시와 아베 코보의 협업으로 완성된 영화로 아베의 독특한 실존주의적 세계관이 전면에 드러난다. 아베는 이 작품에서 개인이 사회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소외되고 결국 사라지는지를 무심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인물들은 모두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체계적으로 왜곡되거나 무시된다. 사람들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는 테시가하라의 영상 연출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변주된다. 그는 인물의 감정을 대사보다 장면 구성과 공간 디자인으로 드러낸다. 황폐한 탄광촌, 무너진 가옥, 끊임없이 부서지는 구조물들은 이 세계의 불안정성과 무너진 인간관계를 상징한다. 특히 광부의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를 활용하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관객에게 감각적 불안을 조성한다.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테시가하라는 음악감독 다케미츠 토루와 협업하여 음향과 침묵, 불협화음을 교차시킴으로써 인물 내면의 혼란을 시청각적으로 전달한다. 불안한 음정, 반복되는 단음, 때때로 이어지는 무음 상태는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장악하며 단순한 공포가 아닌 심리적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는 단지 미스터리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추적하는 불편한 시청 경험을 의도한 연출이다.
3. 함정이라는 은유와 억압 구조 속의 인간 존재
영화 제목 함정(おとし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물리적 함정을 뜻하기도 하지만 구조적 억압과 개인이 빠질 수밖에 없는 사회 시스템을 은유하기도 한다. 광부는 단지 가난했을 뿐이고 살해자에게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았지만, 체계 속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존재였다. 이처럼 영화는 합리성과 공공질서라는 이름 아래 희생되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그린다.
광부가 죽은 후 유령이 되어 이 세계를 떠도는 장면들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결국 아무런 의미 없이 소비되는 현대 사회의 비극을 상징한다. 그는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누구에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방황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역시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용히 익명 속에서 잊혀진다. 이 점에서 함정은 단지 추리극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과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되묻는 영화다. 또한 영화는 권력의 실체를 끊임없이 해체한다. 명확한 지배자도 조직도 없이도 억압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한다. 이는 후코가 말한 규율 사회의 메커니즘과도 유사하며 관객은 자신도 누군가의 함정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근본적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함정은 이러한 구조적 긴장을 통해 사회 전체에 내재된 불합리를 폭로한다.
부조리와 억압, 그리고 실존의 불안
함정은 겉으로 보기엔 미스터리 범죄 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실존주의적 철학과 사회 비판을 담은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다. 테시가하라 히로시는 아베 코보와의 협업을 통해 인간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무력화되고 소외되며 끝내 사라지는지를 철저히 해부한다. 이는 단지 1960년대 일본 사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억압, 실체 없는 폭력, 그리고 목소리를 잃은 개인. 함정은 이 모든 불안 요소를 정제된 흑백 영상 안에 담아 단지 보는 영화가 아니라 생각하는 영화로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순한 결말도 분명한 메시지도 없지만 관객의 내면에 깊은 질문을 남긴다. 나 역시 이 구조의 일부는 아닌가? 나의 목소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처럼 함정은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적 도전이자 철학적 성찰의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