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59년 컬러 영화 부초(浮草, Floating Weeds)는 단순한 유랑극단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가족과 인간관계 그리고 책임과 무책임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게 풀어낸 명작이다. 오즈가 이미 1934년에 같은 제목의 무성영화를 연출한 바 있지만 25년 후 컬러로 리메이크된 이 버전은 색채미, 연출의 절제미, 배우들의 연기 모두에서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유랑극단 속 가족애
무대는 1950년대 일본의 작은 해안 마을. 그곳에 한 유랑극단이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극단의 리더인 고모야 다쓰오는 이 마을에 특별한 사연이 있다. 과거 이곳에서 한 여인 오요시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 사이에서 아이까지 두었지만 떠돌이 삶을 선택한 그는 책임지지 않은 채 그들을 떠났던 것이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공연 때문이 아니라 성장한 자신의 아들 기요시를 멀리서 지켜보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다. 기요시는 어머니 밑에서 바르게 자랐고 아버지의 존재를 단순한 후원자로만 알고 있다. 다쓰오는 아들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며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현재 동료이자 애인인 스미코는 그를 질투하며 기요시에게 접근한다.
스미코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폭로해버리고 모든 균형은 무너진다. 기요시는 배신감에 사로잡히고 다쓰오는 외롭게 다시 떠나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부초처럼 흩어지고 만다.
정적인 시선으로 드러낸 감정의 파도
부초는 오즈 영화 중에서도 컬러의 미학이 가장 정제된 형태로 드러난 작품이다. 오즈는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처럼 격정적인 대사나 연출 대신 침묵과 공간, 시선의 교차, 그리고 화면 구성으로 인물의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그는 카메라를 인물의 눈높이보다 낮은 위치에 배치하는 다다미 샷을 통해 관객을 감정의 흐름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에서 오즈는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인테리어, 복장 색상 등을 정밀하게 조율하여 인물의 내면을 색으로 표현한다. 기요시와 다쓰오가 처음 마주 앉는 다방 장면에서는 서로의 감정이 닿지 않는 어색함을 멀찍이 떨어진 구도로 연출했다. 또 인물이 혼자 있는 장면에서는 배경을 넓게 잡아 외로움과 고립감을 부각시킨다.
배우들의 연기도 절제되어 있다. 격한 감정은 드러내지 않지만 눈빛 하나, 숨 고르기 하나에서 고통과 후회를 느낄 수 있다. 오즈는 절대로 클로즈업을 남용하지 않고 오히려 인물을 화면의 구석에 배치함으로써 인간 관계의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떠도는 삶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
부초(浮草)란 물 위에 떠다니는 잡초를 뜻하며 뿌리 없이 흘러가는 삶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다쓰오의 삶이 바로 그렇다. 그는 유랑극단의 리더로 전국을 떠돌고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도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과거에 떠난 가족에게 용서를 받고 싶고 아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고 싶다.
반면 기요시는 그런 다쓰오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자립적인 청년으로 어머니의 헌신 속에서 성실하게 성장했다. 다쓰오의 갑작스러운 개입은 오히려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외부자일 뿐이다. 영화는 두 사람 사이의 이해불가능함,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혈연적 고통을 통해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그려낸다.
또한 여성 캐릭터들의 입체성도 눈에 띈다. 오요시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자식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며 스미코는 질투와 애증이 얽힌 감정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 모든 인물들은 부초처럼 흐르지만 그 흐름은 각자의 상처와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
관계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또 흘러간다
부초는 가족을 다루면서도 화해나 구원보다는 이해할 수 없음의 정서를 강조하는 영화다. 오즈는 이 작품에서 관계의 매듭을 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듭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부초는 바로 그런 불완전한 관계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고도 씁쓸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이 영화를 다시 보며 우리가 묻게 되는 질문은 단순하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는가? 오즈는 그 질문에 조용히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는 마음에도 진심은 있다. 개인적으로 오즈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서 이 잔잔한 감정을 많은 분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