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에 개봉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번개(稲妻, Lightning, 이나즈마)는 일본 문학계의 대표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정체성과 가족 내의 갈등을 묘사한 걸작입니다. 나루세 특유의 여성 중심 시선과 정제된 연출이 돋보이며 주인공 키요코의 심리 변화는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섬세하게 묘사된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이 영화는 격변하는 시대 속 여성의 자아 탐색과 독립 의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려낸 수작입니다.
시대의 가족에 맞서는 여성
영화의 주인공은 23세의 키요코(다카미네 히데코 분)입니다. 그녀는 도쿄의 전통적인 서민 주택가에서 어머니와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오하나(미야케 료코 분)는 네 자식을 모두 다른 남자에게서 낳은 인물로 전통적 윤리를 벗어난 인생을 살아온 여인입니다.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키요코는 태생부터 어딘가 섞이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갑니다.
영화는 키요코를 중심으로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지를 따라갑니다. 나루세는 이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 회피, 애정, 의존 등을 아주 세밀한 일상 장면 속에 녹여냅니다. 결국 키요코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얽혀 있는 이 가족에게 점점 회의를 느끼고 독립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여성 내면의 갈등과 현실적 자각
번개는 단순히 여성의 독립을 말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와 가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내면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입니다.
키요코는 어머니의 삶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안에 어떤 진실이 있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키요코 자신도 직장 생활에서의 권태, 가부장적 직장문화, 결혼에 대한 회의 등을 겪으며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타인의 기대 속에서 꾸려져 왔는지를 인식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한 남성과 가깝게 지내게 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나루세는 격렬한 대사나 사건으로 표현하지 않고 키요코가 골목을 혼자 걷는 장면,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돌아서는 순간, 거울을 바라보며 한숨 쉬는 동작 등을 통해 감정의 층위를 드러냅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연출 미학과 시대적 맥락
나루세 감독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번개에서도 키요코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녀는 진짜 사람처럼 깊이 있는 입체적 인물로 느껴집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52년은 일본이 미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재건을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경제 성장의 초입에 있었고 동시에 전통과 근대, 남성과 여성, 가족과 개인 사이에서 사회 전체가 방향성을 잡지 못한 과도기였습니다.
번개는 바로 그 혼란 속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키요코는 결국 가족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하고 홀로 살기 위해 방을 구하고 조용히 짐을 싸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일상 속 번개처럼 내려친 자각의 순간
번개는 나루세 미키오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전후 일본 여성 영화의 정수로 평가받습니다.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구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키요코의 조용한 시선과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거대한 정서의 파도를 느끼게 됩니다.
이 영화는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내려는 모든 인간에 대한 찬사입니다. 키요코는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지만 스스로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세상과 맞서 싸우는 방식은 거창한 외침이 아니라 조용한 결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말해줍니다.
지금 시대에도 번개는 여전히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는 무엇인가? 그 물음에 조용히 답하고 싶다면 이 고전은 더없이 좋은 거울이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