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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시대의 가족에 맞서는 여성을 그린 번개

by chaechae100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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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즈마 포스터
이나즈마 포스터

1952년 개봉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번개는 일본 전후 사회의 혼란과 가족 제도의 해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여성의 복잡한 삶을 절제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원작은 하야시 후미코의 동명 소설이며 시대적 배경과 여성 심리를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낸 연출로 나루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무너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게감 있는 삶을 강요받는지를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극적인 연출 대신 일상적이고도 세밀한 감정의 파동을 따라가며 일본 영화 특유의 정적 미학과 인간 심리 묘사의 깊이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내 삶에 직접 떨어진 번개, 전통적인 시대의 가족에 맞서는 여성

영화는 도쿄의 서민 주택가를 배경으로 한 가족 안에서 태어난 네 명의 이복형제와 그 중심에 선 여주인공 키요코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아이를 낳으며 가족은 서로 피를 나누었으나 친밀함이 없다. 키요코는 어머니가 낳은 네 자식 중 막내로 가장 냉철하면서도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가족의 복잡한 관계와 반복되는 갈등에 피로감을 느끼며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애쓴다. 오빠는 무책임하게 결혼을 반복하고 언니는 남편과 별거 중이며 이복 여동생은 사창가에서 일한다. 이 가정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이며 어머니는 여전히 현실 감각 없이 자식들에게 의지한다. 영화는 키요코가 점점 이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녀는 처음엔 무관심을 가장하지만 가족 간의 다툼이 반복될수록 자기도 모르게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가난과 가족 배경 때문에 그 관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키요코는 모든 관계에서 한 걸음 물러서고 어느 날 번개가 치는 날 전차 안에서 혼자 창밖을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키요코의 얼굴과 외부의 천둥, 번개의 불빛을 교차해 보여주며 그녀의 내면적 각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 번개는 그녀가 통과하는 삶의 충격이자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는 결국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선택을 하며 나루세는 이를 격정이 아닌 고요한 고통의 미학으로 완성한다.

침묵의 간극 속에서 터져나오는 삶의 균열

나루세는 영화 전체에서 말보다 사이의 공간을 강조한다. 인물 간의 대화보다 말이 끝난 후의 침묵, 시선의 교차, 방 안의 적막함이 훨씬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키요코와 가족 구성원 사이에는 명확한 갈등이 존재하지만 나루세는 그것을 직접 충돌시키지 않고 은근한 불편함과 지친 표정으로 누적시킨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면하지만 진짜 감정은 어긋나고 비껴간다. 키요코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과거를 회상한다. 이 사이의 순간들에서 관객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억눌려 있고 고단한지를 체감하게 된다. 나루세의 카메라는 클로즈업보다 중간 거리에서 인물과 공간을 함께 포착하며 인간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고립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전차 안에서 키요코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외부 세계를 향한 의지이자 내부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동시에 시사한다. 배경음도 절제되어 있고 감정의 분출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루세 특유의 정적(靜的) 드라마이며 일본 전후 영화의 미학적 성취이기도 하다. 번개는 그녀 인생의 파열음이지만 그것은 외부로 터지지 않는다. 그녀는 끝내 조용히 가방을 챙기고 집을 떠난다. 나루세는 이 결정을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선택은 삶의 일부이고 고통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재하는 아버지들, 책임 없는 사랑의 잔재

번개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제 중 하나는 아버지 없음이다. 키요코를 포함한 네 형제는 모두 다른 아버지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부재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백이 아니라 사회적·도덕적 책임의 회피를 의미한다. 어머니는 과거의 남편들에 대해 특별한 비난 없이 회상하지만 그 기억은 온전하지 않고 희미하다. 자식들은 그 남자들의 그림자 속에서 혼란과 갈등을 경험하고 그 중 가장 의식적으로 그 유산을 끊으려는 인물이 키요코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를 원망하거나 운명을 저주하지 않는다. 대신 그 복잡하고 균열된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반복되는 실패를 넘어서기 위한 작은 용기를 낸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시적인 탈출이 아니며 가족은 감정의 연대가 아니라 생존의 틀이다. 나루세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가족이라는 단위가 전후 일본에서 얼마나 흔들렸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과 무게는 감정적 선택의 여지를 좁게 만든다. 키요코는 가난과 가족 배경 때문에 연인과의 관계를 포기하는데 이 장면에서 나루세는 그녀의 표정을 길게 비추며 한 여성의 주체적 포기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포착한다. 사랑은 책임을 동반해야 하고 그 책임은 때로 감정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진다. 그녀의 결단은 비극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다.

번개는 큰 소리로 울리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가장 조용하게 전달한다. 감정은 절제되고 선택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여운은 강력하다. 나루세는 인간의 존엄과 선택 그리고 시대에 짓눌린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일본 영화사 속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확보했다. 이 영화는 지금의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기며 한 여성의 조용한 각성과 삶의 주체화를 통해 시대와 무관한 진실을 말해준다. 번개는 삶의 비극을 조용히 껴안고 가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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