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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가득한 일상 속 말하지 못한 진심 산의 소리

by chaechae100 202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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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소리 포스터
산의소리 포스터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1954)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으로 결혼 제도 안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부부의 정서적 단절을 고요하게 그려낸 영화다. 이야기는 도쿠사부로와 후미코라는 중년 부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며 외도, 침묵, 반복되는 갈등을 통해 부부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삶의 피로감을 드러낸다. 남편 도쿠사부로는 직업도 없이 가부장적 권위를 유지한 채 살아가며 외도를 일삼는다. 후미코는 그런 남편을 향한 체념과 분노를 동시에 안고 있으나 이혼이라는 단절보다는 일상을 이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는 사건 중심이 아닌 감정 중심의 구조로 전개되며 장면마다 인물의 말 없는 표정과 공간의 정적이 중심을 이룬다. 나루세는 후미코의 내면에 집중하며 여성으로서의 상처, 아내로서의 피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고립을 집요하게 담아낸다. 도쿠사부로는 가족과의 단절뿐 아니라 사회로부터도 점점 멀어지며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무책임한 삶의 결과 앞에 서게 된다. 후미코는 떠나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 역시 구원이 되지 못하는 상태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정조는 침묵이며 그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오가는 대화는 있으나 소통은 없고 같이 있는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오히려 더 멀어진다. 산의 소리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침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저항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나루세는 파괴적인 드라마 대신 흐릿한 정서를 따라가며 그 흐름 속에 일본 사회의 부부상이 처한 근본적 균열을 투영시킨다.

침묵으로 가득한 일상 속 말하지 못한 진심

후미코는 침착한 얼굴 뒤에 무수한 상처와 갈등을 숨긴 인물이다. 남편 도쿠사부로의 무책임한 태도와 외도에 대해 외면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않는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자기 감정을 억누른 채 일상이라는 이름의 감옥을 조용히 순환한다. 도쿠사부로의 외도 사실을 알면서도 직접적인 항의 대신 작은 말투와 행동의 단절로 저항한다. 그녀의 저항은 비명보다 낮은 목소리로 눈물보다 메마른 시선으로 표현된다. 영화에서 후미코는 수없이 등장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중심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나루세가 선택한 연출 방식으로 여성의 존재가 가정 안에서 어떻게 투명하게 취급되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후미코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 목소리는 공간 속에서 흩어지고 되돌아오지 않는다. 특히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반복적 대화 구조는 이들의 관계가 이미 끝났음을 더욱 강조한다. 그녀가 떠나지 않는 이유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 구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이 없는 상황, 주변의 시선 그리고 아내라는 역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그녀를 묶어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점점 단단해지고 말은 줄어들며 표정은 무표정이라는 방어막 속에 안착한다. 나루세는 후미코를 통해 남아 있는 것의 무게를 보여준다. 사랑도 없고 존중도 없는 공간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여성의 감정은 상처와 동시에 하나의 생존 방식으로 작동한다.

도쿠사부로의 공허한 웃음이 던지는 무력함의 반복

도쿠사부로는 전통적인 가부장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주도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직업 없이 하루를 보내고 과거의 지위와 체면만을 되뇐다. 겉으로는 점잖고 유머러스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 속은 공허함과 도피로 가득하다. 후미코와의 대화에서도 그는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며 문제를 직시하기보다 회피하거나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그의 외도는 욕망의 발산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부정을 덮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그는 가정 내에서 정서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있다. 도쿠사부로의 이러한 모습은 단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일본 중산층 남성들이 맞이했던 정체성 위기를 반영한다. 전후 사회에서 변화하는 가치관 속에서 그는 여전히 남편이라는 위치를 고수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위치에 서 있다. 그가 웃는 장면은 많지만 그 웃음은 실없는 농담 이상의 감정을 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웃음이 반복될수록 그가 놓인 공허함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집 안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며, 후미코의 무표정 속에 담긴 냉담함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도쿠사부로는 문제를 만들고도 책임지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실천하지 않으며 결국 관계의 파탄을 자신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나루세는 그런 도쿠사부로를 비난하지 않지만 냉정하게 그 무력함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무력함은 관계를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로 제시된다.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남은 시간의 무게

산의 소리는 결국 이혼이라는 단절조차 완결시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후미코와 도쿠사부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을 기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아간다. 이들은 갈등의 끝에서 벗어나지 않고 갈등이 없는 척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간다. 가족이라는 구조는 둘 사이의 감정을 매개하지 못하며 오히려 감정을 봉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은 흐르지만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결말의 정적이다. 누구도 떠나지 않고 누구도 남지 않는다.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변화하지 않음이야말로 이들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가장 깊은 비극성을 지닌다. 나루세는 시간을 소재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데 탁월한 연출을 보여준다. 같은 장소, 같은 대화, 같은 시선이 반복되며 감정은 마치 낙엽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이 영화에서 이혼은 단절의 해방이 아니라 그조차 실현되지 못하는 무기력한 바람으로 묘사된다. 후미코는 떠날 수 없는 여인이고 도쿠사부로는 잡지 않는 남편이며 이들의 시간은 흘러가면서도 정체된 감정의 늪 안에서 계속 맴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침묵은 그 어떤 대사보다 깊게 스며든다. 관객은 그 침묵을 듣게 되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을 체감하게 된다. 나루세는 언어보다 강한 정서를 이끌어내는 데 집중하며 산의 소리를 통해 결혼의 피로와 시간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침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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