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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와 불안한 현실을 다룬 동경의 합창

by chaechae100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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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합창 포스터
동경의합창 포스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31년 작품 동경의 합창은 일본의 경제적 불황기 전후의 사회 변화를 앞둔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초창기 무성영화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오즈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이 점차 구체화되는 전환점에 해당한다. 동경의 합창은 회사원의 해고라는 단순한 플롯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위기, 사회 구조의 비정함,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개인의 미묘한 감정과 관계를 세심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는 오즈 특유의 저각도 카메라, 고정된 시점, 정적인 연출로 전개되며 말이 아닌 사이의 시간에서 피어나는 감정과 인간성의 울림을 담고 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당시 일본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근대화와 불안한 현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영화는 도쿄의 중산층 회사원 오카지마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면서 시작된다. 오카지마는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을 지는 가장이지만 회사의 위계질서와 상사에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인 끝에 부당하게 해고된다. 그는 처음에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지만 아내와 자녀들의 현실적인 반응 속에서 점차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아내는 원망 대신 조용히 함께 미래를 고민하며 실질적인 생계 유지에 대한 압박 속에서도 남편을 감싸려 한다. 해고 이후 오카지마는 생계 유지를 위해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당시는 대공황의 여파로 취업 환경이 극히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전직 동료와 옛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점점 자존감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옛 스승이 소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권유로 조심스럽게 가게 일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상이었지만 가족의 따뜻한 지지와 아이들의 해맑은 반응 속에서 그는 점차 일에 적응하고 웃음을 되찾아간다. 마지막 장면은 오카지마가 소바를 들고 가게 앞을 오가는 일상적인 풍경으로 마무리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무 설명 없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좌절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간의 존엄한 순간을 기록한다. 합창은 바로 이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살아내는 소리 없는 위로이며 일상을 통해 회복되는 연대의 은유로 기능한다.

침묵이 울리는 공간, 말 없는 장면이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동경의 합창은 무성영화지만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풍부한 의미가 흘러넘친다. 오즈 야스지로는 말보다 장면의 구성, 인물의 시선, 정적인 구도 속에서 깊은 감정을 끌어내는 연출에 집중한다. 해고 직후 오카지마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마주하는 장면, 식탁 위에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가족의 모습, 아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젓가락을 내려놓는 장면 등은 어떤 대사보다 깊은 정서를 전달한다. 특히 오즈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낮은 시선에서 고정된 카메라는 인물들의 일상적인 행동과 감정의 흐름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시선의 교차, 인물 간 거리, 그리고 프레임 밖의 공백까지 의미를 담아내며 관객은 마치 그 방 안 어딘가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소바 가게 장면들은 시종일관 조용하면서도 따뜻하다. 오카지마는 말없이 일하고 손님과의 교류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 그는 점차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한다. 이 영화의 감정은 절제된 연출에서 태어나며 그 절제는 단지 형식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 그 자체다. 오즈는 삶이란 늘 크게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버텨내는 일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가족은 작은 사회다, 그 안에서 지켜야 할 체온

동경의 합창은 단지 한 회사원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다. 이 영화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책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삶 속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없는 대답이다. 오카지마의 해고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족 전체의 삶을 흔들고 그 안에서 각자가 감정과 역할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 영화의 중심 축이다. 아내는 조용히 현실을 받아들이며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동반자로서 행동한다.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현실을 직시하며 아버지에게 기대기보다는 그의 행동을 바라보며 배워나간다. 특히 큰아이가 식탁에서 밥이 줄어든 걸 알아채고 묵묵히 먹는 장면은 오즈가 말하고자 하는 가족의 상징적 순간이다. 가족은 불완전하며 때론 서로에게 실망하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나루세가 여성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오즈는 가족 전체의 정서를 수면 아래에서 끌어올린다. 동경의 합창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족의 의미를 말없이 일깨운다.

희극과 비극 사이, 그곳이 우리의 진짜 현실이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간헐적으로 유머를 섞는다. 그것은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오즈의 방식이다. 해고된 다음 날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웃는 오카지마, 소바 가게에서 서툴게 일하다 실수하는 장면, 주변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 등은 삶이란 단순히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즈는 관객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삶의 복잡한 감정들을 조용히 제시하며, 공감하게 만든다.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삶의 본질과 닿는다. 오즈는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해석할 수 있도록 공간과 여백을 남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동경의 합창은 무대에서 끝나지 않고 관객의 현실로 이어지는 합창이다.

동경의 합창은 대사를 제거한 채 더 많은 말을 품은 영화다. 조용한 연출, 정적인 화면, 말없는 인물들 속에서도 모든 장면이 살아 있다. 오즈는 삶의 본질이 거대한 드라마가 아닌 작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에도 인간은 다시 그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카지마가 소바 가게 앞을 지나가는 장면은 아주 짧고 단순하지만 그 어떤 영웅 서사보다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그는 다시 살아가고 있고 가족과 함께 노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오즈가 말하고자 한 합창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소리 없는 노래. 그 합창은 시대를 지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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