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거미줄처럼 엮인 권력의 환상 거미집의 성

by chaechae100 2025. 7. 21.
반응형

거미집의성 포스터
거미집의 성 포스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거미집의 성(1957)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일본 전국시대의 무대에 옮겨와 인간 욕망의 파괴성과 숙명적 공포를 기묘한 영상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권력투쟁의 서사를 일본의 노(能)미학, 미장센 그리고 극단적인 조명과 안개를 통해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전달하며 인간 내면의 그림자와 환상의 세계를 교차시킨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무장 와시즈 다케토키가 있다.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절친 미키와 함께 귀환 도중 길을 잃고 거미숲에서 정체불명의 노파를 만난다. 그녀는 예언을 통해 와시즈가 장차 스파이더즈 웹 성의 주인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후 예언은 현실이 되고 와시즈는 아내 아사지의 조언에 따라 주군을 암살하고 권력을 쥔다. 하지만 예언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그를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후에도 그는 반란과 배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결국 광기로 치닫는다. 아사지는 불안과 침묵 속에서 와시즈를 조종하지만 스스로의 감정도 억누르지 못한 채 파멸로 향한다. 거미집의 성은 단순히 욕망의 죄라는 주제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공포가 인간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자멸로 몰아가는 과정을 시각적, 심리적으로 추적한다. 구로사와는 기존의 맥베스 해석에서 벗어나 전통 일본 문화의 무대미학과 상징을 활용해 비극을 더욱 압축적이고 숙명적으로 만들어낸다. 영화는 예언에서 출발해 자기파괴로 수렴되는 이 서사를 통해 인간이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얼마나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거미줄처럼 엮인 권력의 환상

거미집의 성의 중심 서사는 권력을 향한 집착과 그로 인한 몰락이다. 와시즈는 처음에는 충성심과 용맹을 지닌 장군이지만 거미숲에서 만난 노파의 예언에 의해 내부의 야망을 자각하게 된다. 구로사와는 이 장면을 환상적으로 연출한다. 자욱한 안개, 정적인 숲, 그리고 초현실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노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그녀의 말은 단지 미래의 예고가 아니라 인물 내면에 이미 존재하던 욕망을 활성화하는 방아쇠로 기능한다. 귀환 후 와시즈는 아내 아사지의 설득에 무력하게 흔들린다. 아사지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예언이 실현되려면 먼저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심리적 충돌로 욕망과 죄책감, 공포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와시즈는 결국 주군을 암살하고 스스로 성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권력을 쥔 순간부터 그는 안정을 얻지 못한다. 예언이 맞아떨어질수록 그는 또 다른 예언의 실현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미키의 아들을 의심하고 제거하려 하며 무분별한 숙청과 잔혹한 통치로 주변을 적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아사지 역시 점점 침묵과 광기 속으로 빠져들며 부부는 서로를 의심하고 고립시킨다. 와시즈는 마지막까지 예언을 믿으며 거미숲이 움직이면 자신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마지막 경고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 숲은 움직이고 병사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화살 세례 속에서 와시즈는 절규하며 쓰러진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예언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한 인간의 자멸이다.

노(能)의 미학과 미장센으로 형상화된 내부 심리의 시각화

구로사와는 거미집의 성에서 일본 전통 공연예술인 노(能)의 표현기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인물의 감정을 극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와시즈와 아사지의 연기는 거의 무표정에 가까우며 감정의 분출보다는 억압과 축적에 집중된다. 아사지의 등장 장면은 고요한 움직임과 명확한 프레이밍으로 구성되어 인물이 무대 위의 인형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는 그녀가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논리와 침묵으로 와시즈를 조종하는 권력의 중심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단 한 번의 고성도 없이 남편의 행보를 좌우하고 그녀의 냉정한 표정은 공포보다 더 강한 긴장을 자아낸다. 반면 와시즈는 점점 심리적 균형을 잃어간다. 구로사와는 와시즈의 정신 붕괴를 표현하기 위해 구도와 조명을 적극 활용한다. 그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잠긴 채 흔들리고 병풍 뒤의 실루엣, 움직이는 안개, 사방을 가리는 어둠은 그의 내면 세계를 시각적으로 투영한다. 이러한 시각적 구성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외부 공간에 반영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특히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의 미장센은 절정에 이른다. 와시즈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하고 화살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장면은 절대적인 고독과 파국을 물리적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그 장면의 정적과 파괴적 폭발의 대비는 그의 몰락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세계의 붕괴임을 상징한다. 구로사와는 감정의 내면화와 시각적 공간의 활용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관객이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정치적 은유로 해석되는 예언과 파멸의 구조가 남긴 상징성

거미집의 성은 단순히 한 인물의 비극이 아니라 권력 구조와 인간 심리에 대한 보편적 통찰을 담고 있다.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장치로 기능한다. 와시즈는 예언을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 그 예언대로 행동하고 그 믿음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불확실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 사실을 실현해내는 자기충족적 예언의 구조를 드러낸다. 구로사와는 이 메커니즘을 통해 당시 일본 사회는 물론 보편적 정치 권력의 불안과 폭력성을 상징화한다. 와시즈는 독재자이자 피해자이며 그의 공포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구조의 병리로 확대된다. 아사지는 마치 체제의 조용한 동조자처럼 감정 없이 권력을 위한 논리를 반복한다. 그녀는 폭력을 부추기되 절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며 책임에서 벗어난 위치를 점유한다. 이러한 인물 구도는 권력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고 다만 그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붕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거미숲이라는 설정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혹은 운명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와시즈는 숲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맹신 속에 서 있지만 결국 그 숲은 병사들의 반란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구로사와는 이처럼 상징과 리얼리즘을 교차시키며 인간의 이성적 계산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거미집의 성은 인간의 욕망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떻게 타인의 손을 빌려 스스로를 무너뜨리는지를 정교하게 해부한 정치적 비극으로 남는다.

반응형